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조선에 준 영향 === 조선의 타격도 매우 컸다. 왜란 이후 야심차게 양성한 [[조총]]병 수천 명 및 조총 수천 정이 이 전투로 증발했다. 왜란 이후 조선의 인구도 격감했고, 수공업과 경제도 별로 좋지 않았던 상황에서 이런 조총병 및 조총을 날려먹은 것은 조선의 국방력에 큰 타격이 되었다. 때문에 광해군은 이후 명나라의 원병 요청(주로 조총병)이 거듭되지만 파병을 거부했다. 조선 조총병은 명청 양국에 인상적이었든지, [[1637년]]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군을 지원해 명군을 쳤지만, 이때도 항상 조총병을 파병했다. 조선군이 청군측으로 파병되어 명군과 싸운 '''[[송산 전투]]'''에서 명군은 조선 조총수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이때 명군을 지휘했다가 청군에 투항한 [[홍승주]]는 이에 원한을 품었는지, 조선측이 공식적으로 국교를 끊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자신들과 내통했다는 사실을 청군에 자백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전장에 투입된 조선병 13,000명 중 30% 정도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 생활 중 처형되었다. 7,000여 명이 전사하고(9,000여 명 궤멸) 4,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 중 900여 명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500여 명은 포로 신분으로 범죄를 저질러[* 여진족 마을 약탈과 여진족 여인 강간 및 후금군 수급 은닉 중 발각] 학살당했다.[* 심지어 누르하치는 포로들을 전부 몰살시켜려고 했었나 아들인 다이샨이 말려서 전원 몰살은 하지 않았다. 후금은 포로들을 계급별로 분리해 관리했는데, 양반 출신 포로들이 위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연대 책임으로 이 양반 출신 500명이 학살되었다.] 결국 2,700여 명만이 생환할 수 있었다(이민환, 《[[책중일록]]》). 훗날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군의 붕괴와 함께 이후 후금군 및 청군이 쉽게 조선의 북방을 유린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조선군의 강홍립 및 고위 장수 10여 명은 허투알라 성내에서 비교적 후대를 받으며 지냈고, 학살되지 않은 일반 사졸들은 성 밖에서 노역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빛을 발해 강홍립과 김경서를 제외한 포로들은 1년 후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청나라측은 강홍립을 석방하지 않은 이유를 몸값을 안내기 때문이라고 조선 사신에게 말했는데, 실제로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생각해서 억류하는 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강홍립은 누르하치의 포로라기보다는 객장의 대접을 받았고, 후금측의 주선으로 허투알라에서 첩까지 얻어 생활했다. 이렇게 귀환했던 포로 가운데 한 명이었던 종사관 이민환은 《[[책중일록]]》을 남겨 후대인들로 하여금 당시 조선군의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강홍립은 정묘호란 후에야 귀국했고, 김경서는 억류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어쨌건 광해군은 이후, 이 전투의 참전을 통해 [[재조지은]]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판단한 뒤 명나라에 거리를 두며 후금과 명나라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중립외교를 시행했다. 다만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자들이 지배하던 조정은 계속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방해했고,[* 심지어 광해군을 등극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이첨]] 등의 [[대북]]은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 세력보다도 더 후금에 적대적이었다. 서인 세력의 대후금 온건파인 최명길이나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의 주화파였다.] 친명배금 정책을 계속 주장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강홍립이 항복한 것을 두고 명나라가 조선을 의심할까 걱정했지만, 실제로 명나라는 의심은 커녕, 수천 명이 전사한 조선이 후금에 붙을까봐 염려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희종 [[천계제]]는 조선의 전사자들 유가족을 위문한다는 명분으로 은자 수만 냥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르후 전투가 조선 사대부들의 화이관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는데, 그들은 후금의 실력으로 명나라가 참패했음에도 후금의 실체를 보기보다는 명나라가 운이 안좋은 것 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는 현대에도 흔하게 보여지는 모습이다. 당장 21세기에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그 정도의 추태를 보일 거라 통찰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조선 사대부들은 사르후 전투에서 보여준 명나라의 한심함과 후금의 막강한 군사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막연한 당위론적인 사고로 명나라가 최후에는 만주를 다시 평정할 것이니 후금에 유화책을 쓰면 나중에 명나라에 책임을 추궁당할지도 모르니까 후금에 계속 적대정책을 펼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과대평가 및 후금에 대한 과소평가는 이후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두 참화를 부르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